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메리카 연합국 (문단 편집) ==== 장병 구성 ==== 남부의 육군 장교들은 귀족적인 명문가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남부가 탈퇴하자 [[미 육군]]에서 [[전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 [[장교단]]의 지휘자질이 상당히 우수한 편이라 초반에 북군을 고전케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관급 이상 고위층은 대부분 북군에 남았고, [[버지니아 군사대학]] 출신 하급장교들만 일부 남군으로 넘어갔다. 초전에서 북부 연방군의 고전은 준비부족 및 의지부족, 보신주의 행보로 과감한 군사작전을 기피한 사령부 탓으로 봐야 한다. 남군도 준비가 부족했지만, 1850년대부터 꾸준히 연방 탈퇴 이야기가 나오면서 주마다 군사조직을 준비했고, 전쟁이 터지기 직전인 1860년에는 이미 준비가 되어 연방요새, 연방조폐국을 털고 있었다. 이런 불법적인 사건들에도 임기말이라 레임덕이던 뷰캐넌은 연방의 해체를 우려하여 노예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지 않았고,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연방군을 링컨에게 물려주게 된다. 대표적으로, 1825년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로버트 E. 리 장군이 있지만 이 사람도 초전에는 패전했다. 대다수의 웨스트포인트 미국 군사 아카데미 출신들은 연방군에 가담하였으며, 초기 남군의 영웅은 P.G.T. 보우리가드[* 프랑스계 장군으로, 이후 그랜트에게 [[샤일로 전투]]에서 패한 뒤 몇몇 전공도 세웠지만 데이비스 대통령과의 갈등으로 상대적으로 한직을 전전했으나, 이후에도 남군의 위기마다 소방수로써 활약했으며, 전후 흑인 인권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와 [[토마스 잭슨|토머스 '스톤월' 잭슨]][* 유능한 장교였던 건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너무 공세지향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리의 과중한 임무부담으로 장기간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고강도의 기동전을 자주 벌였다. [[챈슬러스빌 전투]]에서 아군 오인 사격으로 입은 부상에 폐렴이 겹쳐 전사했다.]이었지 리가 아니었다. 총 동원인원은 불분명하나 약 120만에서 최대 200만까지 본다. 1861년엔 의용군 10만이었으나 이듬해인 1862년에 40만까지 늘었고 같은 해 4월 16일에 징병령을 내려 18세에서 35세의 백인 남성을 징병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엔 징병 상한선을 45세로 늘렸고 1864년 2월 17일엔 50세까지 늘렸다. 그리고 1865년 3월에 --급했는지-- 흑인 징병령을 내렸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노예 해방 조항은 주인이 허락해야 한다는 식이라 인기가 없었는데다가 며칠 뒤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될 정도로 이미 이 즈음에 가면 남부의 정부 기능은 맛이 가서 얼마 징병하지 못하고 패했다. 그러니까 남군에도 흑인 전투병이 있었다는 것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 북군은 United States Colored Troops, 즉 아메리카 합중국 유색군을 창설하였고, 이들은 주로 후방 주둔군으로 많이 사용되었지만 전방의 전투에도 종종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피터스버그 포위전]]의 구덩이 전투에도 참여했고, 남군의 중요 항구 중 하나인 [[찰스턴]]을 점령하기 위한 일환으로 벌어진 포트 와그너 전투에서도 흑인으로 구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는 최전선에서 돌격하다가 거의 반(600명 중 270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내슈빌 전투]]에서도 유색군이 대거 참여하였다. 내슈빌 전투 중 스티드먼의 임시 분견대 군단 중 2개 여단이 유색군이었다.] 남군은 전쟁 막바지까지 노예의 군입대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었다. 많은 수의 노예들이 그들의 주인을 따라다니며 짐을 나르고, 요리를 하거나 청소, 빨래 등 허드렛일을 했거나, 남부연합 정부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 노역을 했을 뿐이었다. 북군 병사들의 기록에 남군 측에 있던 남군 옷을 입은 흑인이 자신에게 총을 쐈다는 기록도 있긴 하지만 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군 병사들은 노예제의 정당성에 대하여 깊게 믿고 있었다. 남부 인구의 약 30%가 노예 소유주였던 것으로 추산되었고, 리 휘하의 북버지니아군의 경우 일반 남부 연방 시민보다 노예주일 가능성이 약 40% 더 높았다. 남군 이병 조셉 메이즈(Private Joseph Maids)의 경우 "난 자유민을 위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것이지, 자유로운 흑인을 위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싸우는 게 아니다. 그리고 흑인들과 같이 싸울만큼 내 조국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I did not volunteer my services to fight for a free negro's free country, but to fight for a free man's free country, and I do not think I love my country well enough to fight with black soldiers."]라고 하여 흑인 병사들과 함께 전투하는 것을 반대하는 의사를 명확히 밝혔다.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은 북군의 벤자민 버틀러 장군이 도주노예를 남부의 노예주에게 돌려주기를 거부하자 남군 병사들에게 사기를 진작시킨답시고 한 연설에서 "이미 저들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의 증오가 흑인들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그를 너와 동격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부추긴 노예 반란이 그들에게 가져올 갓난아기들의 피와 결백한 여성들에 대한 학살이 그들에게 닥칠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남군 병사들부터가 이 전쟁이 '''노예제를 지키기 위함'''인 것을 명명백백히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군이 흑인 병사들을 편제하거나, 흑인을 병사로 쓸 수는 없었다. 남군 진영에 있던 흑인 노예들이 남군 옷을 입는 것부터가 그렇게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일부 노예들은 정말 자신의 노예주를 따르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투 중에 자기 주인의 소총을 들고 북군에게 총을 몇 발 쐈다는 것 말고는 병사로 복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 1890년에 남부의 재향군인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에 3,273명의 남군 출신 흑인이 살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전쟁이 끝나고 남군의 미화가 한창이던 시절이라 신뢰할 수 있는 조사가 아니며, 남군 출신 흑인병사란 곧 주인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 같이 참여한 노예였거나 참호를 파는 등 공병이었지 정식 군인은 아니었다. 흑인을 군인으로 쓰자는 주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패트릭 클레번(Patric Ronayne Claburne) 소장은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와 레판토 해전을 예시로 들면서 법전에 백인과 흑인 구분만 분명히 명시하면 된다는 식[* 대놓고 노예징병을 언급하지는 않았고 최대한 우회적으로 표현했다.]으로 흑인 징병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나 군부에서의 견제와 남부연합에 대한 충성심에 대한 의심, 정계의 미지근한 호응으로 물 건너갔고, '서부의 돌벽'으로 불리며 로버트 리에게 인정받던 그의 군사적 재능은 군단장 급으로 펼치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 전투에서 무리한 요새전을 수행하다가 전사했는데[* 클레번 본인은 이 전투에 반대했다.] 프랭클린 전투로 인해 6명의 장군들이 전사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남군의 인재풀도 말라가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 촬영된 군복 등을 입고 재향군인 행사에 참여한 흑인 사진이나, 연금 지급 등 기록을 바탕으로 흑인 병사들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지급된 연금 신청서류를 보면, "귀하의 주인이 복무한 연대를 기입해 달라[* What was the number of the regiment or name of the vessel in which your owner served?]"고 되어 있는 등 흑인을 전투병으로써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일한 노예로 취급했다. 또한 흑인들이 당시 재향군인 행사에 초대되었다고 해서 흑인 병사들을 기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짐 크로법의 전성기였고, 이 때의 중심적인 이념은 흑인들은 흑인들 자신들을 위해 백인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흑인들이 유럽에서 (비교적) 평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이 사상이 틀렸고 자신들이 백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백인들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되자, 이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고, 이에 백인들은 때로는 폭력적으로, 때로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이에 맞섰다. 그러한 경험을 겪지 않고 자신의 처지에 비교적 만족하는 노예 출신의 나이든 흑인들은 백인의 지배를 미화하고 선전하기에 좋은 소재였다. 1921년 Confederate Veteran 잡지에는 당시의 연금지급에 대해 "주인들과 전쟁을 함께하고 끝까지 섬긴 신의있는 흑인들"을 위한 연금이라면서 "당시 상황 하의 충성심으로써 근래의 흑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훌륭한 명예를 보인 옛 흑인들을 위해 남부의 다른 주들도 비슷한 제도를 만들 것임은 의심할 바 없다"며 갈라치기를 시도했다.[* "A new feature in the pension appropriation of Tennessee makes an allowance for pensions to the faithful negroes who were in the war with their masters and served them to the end(...) Doubtless other states of the South will make similar provision for their old negroes, whose loyalty under the circumstances showed a fine sense of honor not apparent in later generations of the race."] [[오클라호마]]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 일부도 남군에 가담했으며 북군에 가담한 아메리카 원주민과 교전을 치렀다. 남부에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일부는 흑인 노예를 뒀기 때문이었다. 이는 자신들도 백인들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